아랍에미리트의 동시대 미술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올해 3월까지 열리는 전시 《근접한 세계》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아랍에미리트 현대미술전이다.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아부다비음악예술재단의 공동 기획으로 개최되었으며, 양국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다각도로 조망하는 장을 마련한다.
《근접한 세계》는 중동을 이국적인 이미지만으로 소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관람자는 전시장에 퍼지는 향과 공간의 감각을 따라가며, 이주와 노동, 언어, 개인의 내면 등 오늘날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의 결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특수한 맥락에서 출발한 이야기들은 점차 보편적인 삶의 문제로 확장되며, 관람자 각자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제1섹션: 회전의 장소
첫 번째 전시실은 '집'이라는 장소성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아랍어에서 심장의 어원이 '회전'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듯, 심장이 혈액을 온몸으로 순환시키는 것처럼 집은 끊임없이 회전하는 삶 속에서 잠시 안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전시는 집을 단순히 안락한 장소로 그리지 않는다. 작가들은 집 안의 일상적인 풍경에 낯선 요소를 끌어들여, 불안과 이질감이 교차하는 '언캐니(Uncanny)'한 감각을 드러낸다. 급격한 산업 발전과 글로벌 유통망의 확장은 삶의 조건과 지형을 빠르게 변화시켜왔다. 집은 이러한 불균형과 긴장을 내면화하는 장소가 된다.
압둘라 알 사아디(Abdullah Al Saadi), 스톤 슬리퍼(Stone Slippers), 2013, 혼합 매체, 가변 크기 /사진: 허유나
전시장을 들어서면 압둘라 알 사아디(Abdullah Al Saadi, b. 1967)의 〈스톤 슬리퍼〉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작가는 슬리퍼의 밑창을 닮은 돌을 수집해 발가락 고리를 덧붙여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업은 작가의 고향인 코르파칸에 대한 깊은 애착에서 출발한다. 바위가 많은 지형과 고립된 환경은 오랫동안 그의 작업 세계를 형성한 조건이다.
〈스톤 슬리퍼〉에서 작가는 유목 생활의 고단함을 시각화한다. 차갑고 단단한 돌과 일상적인 사물인 슬리퍼의 결합은 유목적 삶의 여정에 동반되는 외로움과 동행의 부재를 환기한다. 딱딱한 돌의 표면에 덧씌워진 슬리퍼의 형상은 이동과 정착 사이에서 흔들리는 고독한 감정이 응축된 흔적처럼 보인다.
에브티삼 압둘아지즈(Ebtisam Abdulaziz), 자서전(03-07) Autobiography(03-07), 2007, 아카이벌 매트 종이에 크로모제닉 프린트; 단채널 비디오, 아부다비 음악예술재단 /사진: 허유나
반면 에브티삼 압둘아지즈(Ebtisam Abdulaziz, b. 1975)는 시선을 현대 사회로 돌려 과열된 소비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수학과 과학을 전공한 그는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에 코드와 체계적인 구조를 결합하며, 삶과 정체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환원되는지를 탐구해왔다. 영상 작업 〈자서전〉에서 작가의 몸은 브랜드가 찍어내는 이미지처럼 제시되며, 개인이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되는 현실을 가시화한다. 이어지는 작업에서 그는 길거리에서 수집한 플라스틱, 나무, 금속 조각들을 모아 작업을 확장한다. 낡고 버려진 이 파편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결합되어 하나의 '자서전'을 구성하고, 동시에 작품의 구성 요소로 기능한다. 압둘아지즈는 이를 통해 숫자와 정보로는 규정될 수 없는 인간의 흔적과 사유를 보여준다.
제2섹션: 지형이 아닌, 거리를 기록하기
두 번째 전시실은 국가에 의해 고정된 지형과 지도 너머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정서적 만남에 주목한다. 이 섹션은 장소를 물리적 좌표가 아닌 경험과 시간의 축적으로 다루며, '거리'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2관 전시 전경. 좌: 비크람 디베차(Vikram Divecha), 도로 표식(Road Marking), 2017, 열가소성 페인트, 그레이 보드에 반사 유리 입자, 회색 보드, 아트자밀 / 우: 크리스티아나 데 마르키(Cristiana de Marchi), 허물어지는 벽을 위한 기념비(Monument to the Falling Wall), 2021-22, 양모실 손뜨개, 650×125 cm /사진: 허유나
이러한 시도는 이 섹션을 기획한 두 예술가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아나 데 마르키(Cristiana de Marchi, b. 1968)의 〈불가능의 아틀라스〉와 〈허물어지는 벽을 위한 기념비〉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업은 장소의 역사적 맥락을 따라가면서도, 그 안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한편 압둘라 알 사아디(Abdullah Al Saadi, b. 1967)의 〈카말 칸데의 여정〉은 작가가 직접 여행하며 체감한 시간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경험이 축적된 지도를 그려낸다. 작품은 이동의 과정 자체를 기록하며, 거리와 장소를 감각적인 시간의 층위로 전환한다.
모하메드 카짐(Mohammed Kazem), 경로(병합), Directions(Merging), 2022,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이 섹션의 또 다른 기획자인 모하메드 카짐(Mohammed Kazem, b. 1969)은 지리적 표식인 '좌표'를 활용해 아랍에미리트의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 발전 속에서 장소성에 대한 실험을 이어간다. 그의 영상 작업 〈경로(병합)〉에서 모래 위에 적힌 좌표는 밀려오는 파도로 인해 서서히 지워지며 형태를 잃는다. 작가는 이를 통해 파도가 반복해서 밀려오는 공간에서 고정된 경계가 사라지고, 이동 속에서 인간의 흔적이 남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3섹션: 그것, 양서류
마지막 전시실인 '그것, 양서류'에서는 라민 하에리자데(Ramin Haerizadeh, b. 1975), 로크니 하에리자데(Rokni Haerizadeh, b. 1978), 헤삼 라흐마니안(Hesam Rahmanian, b. 1975)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트리오 'RRH'의 작업을 소개한다. 이 전시실은 세 작가가 함께 생활하며 작업해온 공간의 분위기를 옮겨온 듯한 집단적 창작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 공간은 아랍에미리트 건국 50주년 국경일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도시의 삶 속에서 형성된 집단적 정체성이 어떻게 예술적 실천으로 이어지는지를 탐색한다.
아티스트 트리오 라민 하에리자데, 로크니 하에리자데, 헤삼 라흐마니안(Ramin Haerizadeh, Rokni Haerizadeh, Hesam Rahmanian), 오, 그대들이여(O' You People), 2019-22, 아크릴, 젯소, 에폭시, 12mm MDF, 1100×1200 cm, 갤러리 인 시투-파비엔느 르클레르 그랑 파리, 작가 제공 /사진: 허유나
전시 공간 바닥에 설치된 〈오, 그대들이여〉는 관람객이 겹겹이 둘러싸인 막과 같은 회화 구조 안을 직접 체험하도록 구성된다. 이 작품은 석유, 사막, 이주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색채와 재료로 풀어낸다. 화면은 음악처럼 흐르며 서로 연결되고, 이러한 구성은 페르시아 전통 음악 체계인 '다스트가(Dastgah)'를 연상시킨다.
에필로그
아이만 제다니(Ayman Zedani), 사막의 수호자들(The Desert Keepers), 2022, 3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가변 크기, 아부다비 음악예술재단 커미션; 작가 제공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의 마지막 작품인 아이만 제다니(Ayman Zedani, b. 1984)의 〈사막의 수호자들〉은 다른 식물에 기생해 살아가는 '사막고사리'의 삶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의 조건과 방식을 묻는다. 사막고사리는 완전히 독립되지도, 완전히 흡수되지도 않은 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세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
전시는 이 작품을 끝으로 국가와 사회가 규정한 질서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체계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는 않지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예술가들이 던지는 질문들을 따라가게 하며 사유의 시간을 남긴다. 더 나아가 이 전시는 아랍 지역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동시에 완전히 독립되지도, 완전히 흡수되지도 않은 채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가 오늘날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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