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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건설사를 통해 본 해외건설 50년 ② │확장·성숙기(1974∼1981년)] 중동시대 개막 … 대우 '빅3' 떠올라 2015-06-29

25일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해외건설 50주년·7000억달러 수주 달성' 기념식이 열렸다. 1965년 태국 고속도로 공사 수주로 시작된 한국의 해외건설이 어느덧 50년의 역사를 갖게 된 것이다. 522만달러로 출발한 수주금액도 이제 누적 7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지난 50년간 수많은 건설사가 등장하고, 사라졌다. 100년을 버티기
어려운 게 기업이라지만 유독 건설업계는 부침이 심했다. 시대별로 바뀌는 주요 건설사를 통해 해외건설 50년을 짚어 본다.




                                                대우건설은 리비아를 기반으로 급성장, '빅3'의 자리에 올랐다. 
                                  사진은 리비아 뱅가지 북부에 있는 복합화력발전소 공사 모습. 사진 대우건설 제공




한국 해외건설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약의 전기를 맞는다. 동남아에서 벗어나 아프리카, 중남미까지
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로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 해외건설의 주무대는 중동이었다. 1973년 12월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도로공사를
수주하며 열리기 시작한 중동시장은 우리나라 해외건설 황금시대의 기반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이 때는 국내외적으로 중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국내적으로는 1970년대 초 월남전이 끝나면서 베트남에 투입했던 인력과 장비를 활용할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특히 1973년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에 이은 10, 12월 두차례의 '오일파동'(석유가 폭등)은
우리 경제에 큰 타격이었다. 불황이 심화되면서 국내 실업을 해소할 대책이 필요했다.




게다가 외채 누적과 유가 부담으로 국제수지 적자폭도 급속히 늘고 있었다. 반면, 중동시장은 유가 폭등으로
'건설 붐'이 조성됐다.


정부도 적극 지원에 나섰다. '해외건설촉진법' 제정과 해외건설협회 설립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또
지급보증과 조세감면 등 금융·세제지원도 강화했다.


이런 여건속에 우리나라는 연간 수주 100억달러 달성과, 해외건설 2대 강국이라는 해외건설 중흥기를 맞게
됐다.




초창기 상위 10개 중 4개사만 남아 = 이 기간 중 104개 업체가 43개국에 진출했다. 총 수주액은 435억
3007만달러. 29개 업체가 28개국에 진출해 4억2271만달러를 수주했던 개척기(1965~1973년)에 비해 업체수는 3.6배, 진출국가는 1.5배, 수주액은 103배로 늘었다. 건당 수주액도 커져, 1억달러 넘는 공사도 많았다.



시대가 바뀌면서 해외건설을 주도하는 건설사도 달라졌다. 개척기 상위 10개 건설사 중 살아남은 회사는
△현대건설 △ 대림산업 △삼환기업 △한진중공업 등 4개사 뿐이었다. △고려개발 △경남기업 △태화종합
△극동건설 △한양건설 △아주토건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신 △대우건설 △동아건설산업 △한양 △진흥기업 △삼호 △동부건설이 이름을 올렸다.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은 해외수주 1, 2위를 차지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현대건설은 100억달러에 육박하는 92억5490만달러(연평균 11억5686만달러)를 수주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라살가 항만공사(1977년, 2억6342만
달러), 리비아 라스 라누프 항만 공사(1980년,3억6660만달러) 등 굵직한 공사를 다수 수주했다.



대림산업(37억6771만달러, 연평균 4억7096만달러)도 말레이시아 천연가스 액화공장 건설공사(1979년, 3억2646만달러), 사우디 얀부 천연가스 액화공장 및 터미날 공사(1978년, 1억8161만달러) 등을 수주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해외건설 초창기 각각 2, 8위를 차지했던 삼환기업과 한진중공업도 각각 7위(12억2942만달러), 6위(15억9565만달러)로 10위 안에 살아남았다.



한진중공업은 2계단 상승한 반면, 삼환기업은 5계단이나 추락했다. 이 시기 삼환기업은 1974년, 1975년 각각 3위, 2위를 차지하면 강세를 보였으나 뒷심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정체됐다.



반면 한진중공업은 1974년 1위, 1977년 2위, 1981년 4위 등 더욱 강해진 모습을 보였다.



동아건설산업도 강자로 부상 = 해외건설 초기 4위에 올랐던 고려개발은 1974년 5위를 마지막으로 10위권에서 멀어졌다. 1979년(13위) 이후엔 아예 20위권에서도 사라졌다. 5위를 차지했던 경남기업 역시 1974년 8위, 1977년 9위, 1978년 6위, 1980년 8위 등에 올랐지만 종합한 '톱 10'에 머무는 것은 실패했다.



1969년 해외수주 1위까지 차지하며 초기 강자로 군림했던 태화종합과 1971년 2위까지 오르며 선전했던 아주토건도 이후 톱 10에서 사라졌다. 극동건설도 1976년(3위), 1980년(6위) 외에는 10위권 밖을 맴돌았다. 이런 가운데 대우건설과 동아건설산업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1973년 설립된 대우건설은 단숨에 종합 3위에 올랐다. 한국업체로는 처음으로 남미(에콰도르)에 진출하는 등 발빠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대우건설의 주무대는 리비아였다. 이 기간중 수주한 40건 중 33건(82.5%)이 리비아 공사였다. 1978년 가리니우스 의과대학 공사를 시작으로 리비아에 첫발을 내딛은 이후 리비아 트리폴리 중앙병원 완성공사(1981년, 3억1007만달러), 리비아 벵가지 7000세대 APT건설공사(1981년, 5억5487만달러), 리비아 2500교실
건설공사(1981년, 6억5253만달러) 등 대규모 공사를 잇따라 수주했다.



1945년 충남토건사로 시작한 동아건설산업은 리비아 '대수로'공사로 유명하지만 아직은 사우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72년 4위(845만달러) 1973년 13위(165만달러) 등 1970년대 초반들어 상위권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중동붐을 맞아 종합 4위(26억1306만달러)로 급부상하며 다가올 1980년대의 번영을 예고했다.



사우디 리야드 전력 보수공사(1977년,1억29만달러), 사우디 자동전화 공사(1978년, 12억4551만달러), 사우디 얄쥬와 산악도로 공사(1979년, 1억4967만달러) 등을 수주했다.



출처 : 내일신문 (2015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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