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우크라이나발 곡물가 급등으로 한때 빵 사재기가 성행했던 베이루트 이슈라피에 지역의 빵집.2022.4.16.meolakim@yna.co.kr
베이루트 동쪽 외곽 아슈라피에 있는 다른 빵집에서 만난 부점장 아이만(47)씨도 "내일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했다.
빵 사재기는 일단 멈췄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밀가루와 빵 가격 폭등은 베이루트 시민들이 마주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태가 몇 달 더 이어지면 진짜 대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함단 씨는 "전쟁 전과 비교해 밀가루 가격은 3배로 올랐고, 1봉지(대략 900g)에 5천 파운드(약 4천원)였던 흰 빵 가격은 1만1천 파운드(약 9천원)로 배 이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이만 씨도 "내일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먼 앞날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레바논의 빵값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다.
레바논 주민들이 식용유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산 값싼 옥수수기름 가격도 전쟁 후 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베이루트 센엘필 지역에 문을 연 재래시장에서 올리브 절임과 향신료를 파는 아부 마헤르 씨는 "전쟁 전 4L짜리 한 병에 20만 파운드 하던 식용유 가격이 지금은 55만 파운드"라며 "종종 공급이 달려 물건을 못 구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장의 견과류 상인인 멜리 엘딘(45)씨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밀가루와 식용유를 사용하는 가공식품 가격을 20% 올려야 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식량 위기까지 우려하게 된 레바논의 경제 상황은 지난 3년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정부 고위 관료들과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 국가 부채가 눈덩이처럼 치솟으면서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후 3년간 물가는 400%나 뛰었고 현지 화폐인 레바논 파운드화의 가치는 90% 이상 폭락했다.
여기에 2년 이상 이어진 코로나19 대유행과 2020년 베이루트 대폭발 참사 등 돌발 악재가 허약한 레바논 경제를 쓰러뜨렸다.
'중동의 파리'로 불릴 만큼 중동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적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와 여유로운 분위기가 감돌던 베이루트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폭발 책임 공방 속에 13개월간 이어진 국정 공백은 레바논 경제를 회복 불능 수준까지 몰아갔다.
전체 인구 680만여 명 중 75%에 해당하는 빈곤층은 경제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특히 화폐가치 폭락은 에너지, 전기, 의약품 대란을 유발하며 레바논 국민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현지 거주 한인인 김 모(21) 씨는 "외국에 취업한 가족에게 달러를 송금받거나 달러 기준의 고정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정상적인 삶을 살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파운드화 가치 폭락은 곧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도 큰 고통이다.
전기 요금과 연료 가격이 치솟고 수입에 의존하는 기자재와 실험실 용품 등의 가격이 폭등하자 주요 대학이 수업료 중 달러 비중을 계속 늘리려고 하는 탓이다.
아메리칸대학베이루트(AUB) 석사과정생으로 수업료 달러화 비중 확대 반대운동을 주도하는 자드 하니(21) 씨는 "몇 년 전 한 학기 등록금이 2천 달러였는데 내년 봄에는 7천 달러를 내야 할 수도 있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지난해 9월 출범한 레바논의 새 정부는 최근 국제통화기금(IMF)과 3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실무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다음 달 15일로 예정된 총선과 이후 새 정부 구성 등 산적한 정치 일정을 고려할 때 IMF가 요구한 구제금융 요건을 갖추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또 장기 내전(1975∼1990년) 후 종파 간 세력 균형을 위해 마론파 기독교(대통령), 이슬람 수니파(총리), 이슬람 시아파(국회의장)가 권력을 분점하는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는 한 경제 개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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