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한 번쯤 크게 실패하고 완벽하게 무너지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익숙해진, 그래서 내겐 당연히 되어버린 언어, 습관, 인맥, 알량한 지식을 총동원해도 물 한 모금 사 먹을 수 없는 곳.
그런 곳에서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몇 날 며칠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자살폭탄테러’라는 단어에서 멈췄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곳으로 향하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칼럼니스트·포토그래퍼 감성사진사 이두용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난 계획적이다. 실행하는 중간 즈음 포기하기 일쑤지만 계획은 진짜 잘한다. 계획만으로 포상하는 곳이 있다면 난 제법 큰 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나지만 여행에 있어서는 별로 계획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자주, 멀리 떠나는 일이 많은데도 계획하지 않는다. 여행지 명소를 살뜰히 챙기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어차피 처음 가보는 나라, 처음 가보는 길이라면 조금 헤매도 괜찮다는 주의다.
무모한 여행을 계획하고 요르단이라는 낯선 나라를 선택했다. 항공권을 예매해놓고 해외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아랍문화에 대해 공부를 했다. 하지만 정작 요르단에 무엇이 있고 어떤 것이 유명한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역시 ‘가보면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요르단에 첫발을 내딛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는 것을.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암만 공항에 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TV나 인터넷에서 본
테러조직원의 얼굴과 똑 닮은 아랍인들이 공항에 지천이었다. 그땐 아랍인의 얼굴이 그렇게 무섭게 보일 수가
없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고 일단 시내까지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 발생. 가져간 달러를 요르단 화폐로 환전해야 했는데 나는 아랍어를 못했고 공항 경찰은 영어를 못했다. 결국, 만국공통어인 바디랭귀지를
구사해 환전을 하고 짐도 찾아서 공항을 빠져나왔다.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공항. 지금은 암만에 현대식 공항이 생겼지만, 당시엔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공항 건물이 내가 만난 요르단의 첫인상이었다.
어쨌든 요르단에 도착. 택시를 타고 암만 시내로 향했다.
행복이란 단어를 알려준 사람들
난 요르단에서 사진을 찍었다. 물론 계획하고 간 것도 아니고 준비해서 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내겐 인생 자체가 여행이라는 생각이었고 여행에는 반드시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을 뿐이다.
‘포토그래퍼’라는 단어가 아랍어로 ‘무싸위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난 읽지도 못하는 무싸위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쓰인 명함을 만들었다. 일을 하려면 명함은 필수 아니던가.
동양에서 온 사진작가는 영업(?)을 빌미로 많은 사람을 찾아다녔다. 먼저 호주에서 온 피터(Peter)라는 친구를
소개받아 호텔을 벗어나 그 친구의 집에서 하우스쉐어를 했다. 방도 넓고 깨끗한데다 무엇보다 월세여서
호텔보다 저렴했다.
피터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선 하루가 멀다 하고 암만 곳곳을 쏘다녔다. 암만 중심에 있는 시타델(성경에
나오는 고대 유적지)에 올라 동네 꼬마들과 빵 한 조각을 나눠 먹기도 하고, 재래시장에 들러 채소나 과일값을
흥정하기도 했다. 동네 곳곳에 있는 ‘샤이(설탕을 듬뿍 넣은 허브차)’ 가게에 들러 차를 마시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랍음악에 어깨를 실룩이기도 했다.
난 내가 걷는 길, 만나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문화가 다르므로 찍으면 안 되는 것과 찍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가능한 한 많이 다니며 찍을 수 있는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처음 보는 동양인이 무서웠는지 날 보며 우는 아이,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사람들. 도시에
아잔(이슬람 기도문)이 울려 퍼질 때 숙연한 표정으로 모스크를 바라보는 소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7살 꼬마.
그저 지나는 그 누구도 내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무모하게 찾아온 요르단에서 난 그들과 친구가 되었고 어느 순간 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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