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향

[김경수의 오지레이스] 사하라에는 어린왕자가 없다 2015-08-17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늘 가슴 설레게 한다. 하물며 현대와 고대문명이 공존하는 이집트로의 여정은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다.


2010년 10월 1일, 사하라 레이스 출전을 위해 고려인 카레이스키의 애환이 서린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Tashkent를 거쳐 카이로에 들어갔다.



비자는 공항 입국장에서 5달러를 주고 즉석에서 받았다. 이집트는 GDP의 65%가 관광수입일 만큼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비자를 받는 것이 환전보다 쉬웠다.


카이로는 발에 밟히고 눈에 보이는 대부분이 국보급 유물로 즐비했다.


막간을 이용해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 옆 이집트 고고학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유리관을 사이에 두고
박물관 2층의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와 3천 년을 뛰어넘는 대면을 했다.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유대 헤롯왕의 영아 학살을 피해 예수님 일가가 기거했다는 아기예수의 피난처 교회도 들러 묵상으로 사하라 입성 신고를 대신했다.


다음날 베이스캠프가 있는 카이로 서부 건천지역의 호숫가로 이동했다. 남쪽 호수Lower lake의 수면이 저녁
노을을 머금은 채 잔잔히 일렁이다 자줏빛으로 물들어갔다.


Traversing Ancient Waters 레이스 첫째 날(38km), 아침 7시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36개국에서 모여든 156명의 건각들이 열사熱沙 위로 뛰어들었다. 묵직한 배낭 멜빵이 쇄골을 우악스럽게 조여 왔다.


온몸이 흙먼지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호수 주변을 따라 모래와의 사투가 반나절 가까이 이어졌다. 정오를 넘자 사하라의 열기가 50도를 넘어섰다.



선수들이 후끈 달아오른 듄Dune의 능선을 향해 병정개미의 행렬처럼 길게 늘어섰다. 모두 고개를 떨 군 채 연신 가쁜 호흡을 몰아쉬었다.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Sandy Horizons 레이스 둘째 날(35.7km), 파란 하늘과 황금 모래 그리고 그 위에 꽂힌 분홍 푯대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삼색의 조화를 연출했다.



사하라를 품을 듯 달려든 패기는 타는 열기 앞에 무기력하게 녹아내렸다. 내딛는 발목이 모래 늪에 빨려들지만
저항은 누구도 엄두를 못 냈다.


다만 체면과 일 때문에 남을 위한 인생을 살아온 내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사하라로 선수들은 더욱 깊게 밀려들어 갔다.


Through the Sand Valley 레이스 셋째 날(43km), 선수들이 줄지어 왕의 계곡으로 들어섰다. 사하라가 거친
민낯을 드러냈다.



주로 양옆으로 버티고 선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근엄한 모습으로 선수들을 맞았다. 오랜 시간과 바람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역작들이었다.


하지만 이글대는 태양열은 선수들의 몸통을 조이며 체내의 수분을 쉴 새 없이 빨아냈다. 파라오의 분노인지 타는 갈증과 터진 발가락 통증도 더욱 심해졌다.



기댈 곳, 의지할 곳 없는 광활한 사막. 사하라는 애절하게 손짓하는 선수들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The Gardens of the Castle 레이스 넷째 날(38.4km), 어제까지 열사를 뚫지 못한 31명의 선수들이 푸석한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문명의 손길을 거부하는 사하라! 살아남은 전사들은 신세계를 향해 듄의 언덕을
넘었다.


동물 화석과 옥돌들, 버섯과 팽이 모양의 석회암 조각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수천 만 년 풍화에 깎이고
다듬어져 여전히 진행 중인 미완의 걸작들로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광야와 협곡을 넘어 미지의 땅, 신비의 대륙 사하라로 깊이 다가갈수록 감동과 희열은 더해 갔다.



The Tethis Ocean March 레이스 다섯째 날(95.3km), 정벌에 나선 전사들이 광야를 가로질러 고래계곡
The Valley of the Whales으로 향했다.


카이로 서남쪽 Wadi El-Hitan의 이 계곡은 2005년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곳이었다. 거대한
고래 화석을 비롯한 해양 화석들이 지면 곳곳에 드러나 신비감을 더했다.


아직 내 마음이 몸을 버리지 않았다. ‘너의 열정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돼. 좀 더 힘을 내야지.’ 고통과 좌절이 공존하던 매 순간 나를 쫓는 소리 없는 그림자가 힘내라 응원했다.


CP4를 지나 모래 능선을 따라 빅듄 위에 올라서자 정상을 향해 사투를 벌이는 자와 넘어선 자의 희비가 극명
했다.


극한으로 치달을수록 모든 신경체계는 오로지 한 곳으로만 집중됐다. 종일 걷고 달려도 뇌는 정지보다 전진과
가속 명령을 두 다리로 전달했다. 멈출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곳!


사하라에는 어린왕자가 없다. 거친 열사와 모래 폭풍만 기다리고 있었다. 혹독퇇 대자연의 반격만 있을 뿐이었다. ‘일어서자! 그리고 가던 길을 마저 가자!’잠이 쏟아지는 내 안의 의식을 흔들어 깨웠다.


자정을 지나 밤새 내일을 향해 긴 터널을 헤맸다. 새벽녘 광야 끝자락과 맞붙은 갯벌 너머로 어마어마한 콰럼호Quarum Lake가 한눈에 들어왔다.



Final Footsteps to the Pyramids of Giza 레이스 마지막 날(3km), 모두가 고대하던 오늘을 다시 카이로에서 맞았다. 한 생애의 희로애락을 모두 맛본 축소된 대서사시가 종지부로 치달았다.


주로에 선 자들은 고난의 시기를 잘 견뎌냈다. 마지막 힘을 쏟아 각국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을 헤치며 삼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돌아 피니쉬 라인을 향했다.



살이 타들어 가는 태양열과 모래폭풍을 벗 삼아 5박 7일 동안 사하라 260km를 달렸다. 나와의 한판 승부에 후회 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용케 멋진 세리머니로 붉은 양탄자를 밟았다.


볼품없고 묵직한 쇳덩어리 메달이 목에 걸렸다. 인간은 막연히 좋아하는 일을 한다. 경제 가치나 보상을 떠나
좋아서 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한다.


어깨가 무너져 내리고, 발톱이 빠져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건 그냥 좋기 때문이다.


사하라가 보여준 짧고 깊은 격정의 드라마를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남에겐 뻔해 보이는 전리품보다 내
몸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하라의 모든 기억이 녹아들어 신재생 에너지로 변환되었다.



나에게 사막은 꽃보다 아름답다. 


출처 : 데이터뉴스 (2015년 08월 11일)

첨부파일
관련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이전글,다음글
이전글 메가박스, 에티오피아•요르단에 이동식 영화관 지원
다음글 무슬림 춘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