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향

[윤용수의 아랍기행] 10. 모로코 탄자 2014-10-31
아랍지역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모로코의 탄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른바 아랍이 이라크에서 북아프리카 끝인 모로코까지의 광대한 지역을 일컫는데, 동쪽 끝이 이라크의 바그다드라면 서쪽 끝은 모로코의 탄자이기
때문이다. 즉, 아랍지역학 전공자에게 탄자는 땅끝 마을이 된다.

 
참고로 탄자(Tanza)는 아랍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스페인어의 '탕헤르'(Tanger)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모로코가 아랍국가이고 현지에서 '탄자'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감안해 이 글에서는 탄자로 쓴다.
 
지중해와 대서양, 두 바다가 만나는 곳
카스바서 내려다본 지브롤터 해협 '장관'
건물도 구조도 유럽색 짙은 아랍도시  
좁은 골목 다닥다닥 붙은 집 정겨워라!
 


탄자는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자 아프리카와 유럽이 부딪히는 지점에 있다. 따라서 아랍지역학을
연구하는 필자에게 탄자 여행은 극지를 찾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탄자를 향한 발걸음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호기심이 가득한 감동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도시의 규모나 역사와 상관 없이 탄자는 그 자체로 큰
감동이었다. 


■아랍과 유럽이 뒤섞인 공존 문화 

탄자는 프랑스가 모로코를 지배했을 때에도 자치지역으로 있었다. 1923년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벨기에 대표로 구성된 국제위원회의 공동 관리에 놓였다. 지리적,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어느 나라의 소유도 서로 인정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이런 특수성 덕분인지 탄자는 아랍과 유럽의 이질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역사를 오래 유지했다. 

유럽에서 탄자로 가는 길은 다양하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스페인의 항구도시 타리파에서 페리선을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것이다. 편도 1시간가량. 유럽과 아프리카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배를 타고 가는 내내 왼쪽으로 지중해, 오른쪽으로 대서양을 바라본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카스바에서 내려다본 지브롤터 해협.
탄자항에도 호객꾼이 많았다. 여느 아랍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다가와 국적을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이들은 어설픈 발음으로 싸이의 세계적 히트 곡인 '강남스타일'을 흉내냈다. 나름대로의 환영 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엔 필자의 눈치를 살피며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뒤섞어 자신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홍보했다. 그때 아랍어로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자 이들은 대뜸 동부지역 아랍어는 이곳에서 잘 통하지 않으니 자신을 고용하라고 떼를 썼다. 괜찮다고 응수한 뒤 호객꾼을 떼어내고 택시에 올랐다. 그러자
택시기사가 이번에는 흥정을 요구했다. "아, 이곳도 아랍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에티켓 수준의 바가지를
감수하는 것으로 모든 흥정을 끝냈다.


■아랍보다 유럽 성향의 항구도시 

탄자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분됐다. 신시가지는 과거 모로코를 지배한 스페인과 프랑스 점령군이 거주한 곳으로 유럽풍의 색채를 띤 건물이 많았다. 반면에 구시가지는 예나 지금이나 아랍인 거주지다. 그러나 막상
구시가지에 들어서니 아랍보다 유럽의 정취가 더 크게 느껴졌다. 도시 구조와 건물 배치도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인 유럽을 닮았다. 


언덕 위에 조성된 구시가의 꼭대기로 올랐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조금 전에 건너 온 지브롤터 해협이 눈앞에
펼쳐졌다. 해협 건너 스페인 땅도 손에 닿을 듯하다. 8세기 초 아랍의 이슬람군과 베르베르인들로 구성된
이베리아 반도의 정복군이 바로 이곳에서 출정식을 가졌을 것이다.


스페인을 향하고 있는 구시가지의 꼭대기에는 낡은 대포가 있었다. 이 대포는 스페인을 지배한 이슬람 군대가
13세기 그곳에서 철수한 뒤 스페인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포신에는 1천200년이라는 숫자가 있었다. 

탄자 구시가지에 전시된 대포.
■서로에게 그늘이 되는 삶의 지혜 

언덕에서 내려오니 전통적인 아랍 시장이 나타났다. 사람들의 민낯을 보기에는 역시 시장이 제격이다. 잡다한
물건과 노점상이 가득한 전형적인 아랍시장이다. 진열된 상품을 보니 스페인 가격의 절반 이하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의 식사비도 다르지 않았다. 필자와 동행인 5명 모두의 점심값이 스페인에서 1인의 식사비로 치른 가격과 같았다.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탄자의 전통시장.
시장을 걷다 보니 카스바(성)가 나타났다. 과거 이 지역을 통치했던 술탄의 성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박물관과 상점, 도시 빈민의 주거지로 바뀌었다. 카스바로 들어 서니 좁은 골목에 집들이 빼곡하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집들은 대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땅이 좁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밀집해서 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마스쿠스의 지하 주택이 떠올랐다. 같은 이유다. 건조한 날씨의 뙤약볕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밀집해서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지혜이자 방식이었다.


카스바에서 내려다본 지브롤터 해협은 장관이다. 한눈에 두 대륙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 그 순간을 담으려 카메라 셔터를 한참 눌렀다. 그런데 왠지 싸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이 지역 거주민들이다. 한 꼬마는 아예 달려와 카메라를 뺏으려 했다. 이방인에게 이곳 사람들은 아직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다. 남루한 옷차림과 경계심에서 경제적, 사회적 차별에 대한 불만이 느껴졌다. 


■'다름'이 배척의 이유 될 수 없다 

아랍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합한 거대한 문화 공동체다. 아랍과 이슬람이라는 우산을 쓰고 있지만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의 공간과 삶의 방식은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아랍기행에서 종종 깨닫는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관념도 여행을 통해 많이 수정됐다. 여행에서 만난 두 종교는 결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여러 차례 설명했지만 베이루트, 암만, 카이로, 튀니스 등 대부분의 아랍 도시에서는
이슬람사원과 기독교 교회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들 두 구조물은 상호 배척보다 오히려 서로 의지하는 느낌도 더 많이 들었다. 보통의 아랍인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배척하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종교간
갈등이 종교 그 자체의 문제보다 종교를 빙자해 권력과 사익을 탐하는 자들의 갈등 조장이라는 사실이다. 


아랍 도시를 여행하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훈훈한 정을 확인한 것도 큰 성과다. 노인을 위해 노선을
과감히 탈선(?)한 암만의 버스기사와 이를 허용한 승객들, 낮선 여행자를 위해 한 달 부식비를 아낌없이 쓴
팔레스타인 가족, 이방인을 위해 자신의 휴가를 포기한 튀니지인의 친절 등도 이미 우리에게는 잊힌 '정'의 다른 모습이었다.




출처 : 부산일보 (2014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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