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동향

[기자의 시각] 아랍 여객기의 '검은 상자' 2015-06-30

2007 9 12일 한 걸프 아랍 국가의 여객기를 타고 카이로로 가는 길이었다. 이륙하고 서너 시간이
지났을 무렵 승무원들이 노트북 크기만 한 검은색 사각 상자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도 아닌데 뭘 주는가 싶었다. 어린이 승객에게 주는 장난감도 아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승무원들은 승객에게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물어보고 사람을 가려 검은 상자를 건넸다. 상자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랍인인 듯했다. '아랍 항공사라고 아랍 사람들에게만 따로 선물이라도 챙겨주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승무원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자리의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아랍 남자와 얘기를 하다가 그의 무릎에 상자를 하나 올려놓고 갔다. 승무원에게 "사람 차별하는 것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영문도 모르고 그럴 순 없었다. 옆의 아랍인에게 "상자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뚜껑을 열어 보였다. 갈색 빛 대추야자 열매, 납작한 빵과 양고기 한 덩이가 들어 있었다. 아랍 전통식
도시락이었다.

 

더 아리송했다. "기내에서 왜 도시락을 따로 받는 겁니까." 이에 그 아랍인은 "요즘이 무슬림(이슬람
신자)이라면 한 달간 해 뜬 시간 동안 금식을 하는 라마단이기 때문"이라면서 "이따가 해가 지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챙겨준 것"이라고 했다. 무슬림 승객들은 이륙 직후 제공된 기내식을 금식 규율을 지키기 위해 먹지 못했다고 했다. 무슬림 이용객이 많은 항공사는 라마단이 되면 이런 경우가 많이 생기기 때문에 '라마단 도시락'을 별도로 만들게 된 것이다. 30분 뒤 비행기 창 밖으로 노을이 지고 해가 떨어지자
무슬림들은 기내 복도에 작은 양탄자를 깔고 엎드려 기도하고 도시락을 먹었다. 몇 명은 자신이 지켜야 할 일몰(
日沒) 시각이 지금이 맞느냐고 주위에 물어보며 혼란스러워했다. 비행기가 지구 자전 방향의
반대인 서쪽으로 이동해서 일몰 시각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나 그에게 계시를 내린 신() 7세기 금식에 대한 율법을 정하면서 훗날 비행기 여행이나 기내식 같은 것이 생겨날 줄은 몰랐던 듯하다. 여름이면 해가 22시간 동안 지지 않는 백야

(
白夜)가 있는 러시아 북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북극 인근까지 무슬림이 퍼져 나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올해 라마단은 지난 18일부터 시작됐다. 라마단 기간은 윤달 없는 음력 법에 따라 정해지는데 올해는
낮 시간이 1년 중 가장 긴 절기인 하지(
夏至)와 겹치는 악재가 꼈다. 그럼에도 세계 16억 무슬림들은
꿋꿋이 금식을 지키고 있다. 주한(
駐韓) 무슬림 대사 중에서는 "한국엔 '유혹'이 많다"며 휴가를 내고 귀국한 이도 있다. 무슬림에게 라마단은 종교적 의식을 넘어 삶 그 자체인 듯하다. 우리에겐 생경한 문화 속의 이들에게 이번 라마단 때 따뜻한 인사말 한번 나눠보는 건 어떨까.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 체류 무슬림은 20여만명이며 그 수는 계속 늘고 있다.

 

노석조 국제부 기자

 

출처: 조선닷컴 (20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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